이사
제일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윤상이다. 어쩜 이름도 윤상일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난다면 윤상과 결혼하고 싶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던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버젓한 신축 아파트에 살다가 빌라로 이사를 간 게.
이사하는 날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에서 엄마는 그 집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크러뜨렸고, 엄마는 진한 한숨을 길게 내 뱉었다. 아빠는 당장 1년만 살거라고 했지만 10년 넘게 살게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으리라.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 연기에 쩔어 누리끼리해진 천장 벽지가 보였다. 장판지는 군데군데 벗겨져 한쪽에는 옥색, 한쪽은 노란색의 무질서한 풍경에서 밥을 먹고, 겨울이면 수도가 터져 세면대가 없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찬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학교에 갔다.
밤에는 천장에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었다. 방충망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 여름인데도 모기가 들어 올까봐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말이다. 대학생 때 고시원에서 살면서 가장 좋았던 건 바로 에어컨이었다.
남자친구가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게 싫어서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지곤 했다. 가로등이 없어 깜깜한 밤엔 무서운 동네였지만 그 보다 찢어진 방충망이 달린 창문을 향해 “저기가 우리집이야 ”라고 말하는게 더 무서웠다.
쥐 오줌 냄새를 맡으며 윤상의 “이사”를 들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이 집에서 그리고 이 거지같은 인생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매일 원하고 상상했다. 내가 살고 싶은 집 말이다.
마당이 보이는 긴 창문으로 햇살을 따스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큰 욕조가 딸린 화장실과 드레스룸이 있으면 좋겠지. 거실에는 넉넉한 쇼파를 두자. 책을 읽다가 까무룩 낮잠도 자야 하니까. 주방은 요리하기 편하게 널찍했으면 좋겠다. 침실과 손님방에는 깨끗하고 하얀 침구를 놓아 두자. 에어컨은 방방마다 두어야지.
세무사가 되도 80만원의 월급으로는 새로운 인생이란 게 도무지 펼쳐지지 않았다. 대학생 때의 고시원이 원룸의 자취방으로 바뀌었을 뿐. 그래도 세면대가 있고 쥐는 나오지 않았으니 다니던 직장이 아무리 야근 많아도 견딜 수 있었다. 늙은 대표의 성희롱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추운 겨울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무실 한 켠에 무상으로 얹혀 살며 직원 한명 없이 젊은 부부가 먹고 살겠다고 전단지를 만들고 찬 바람에 손이 틀 때까지 우체국에 들락날락하며 홍보물을 붙이고 다녔다. 들어오는 일은 그게 뭐든 마다하지 않고 누구하나 알려주는 사람 없이 황무지를 맨 손으로 일구어 나갔다.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다. 그들은 자기의 인생 살았을 뿐. 나는 내 인생을 살면 되었다. 하지만 조금은 외롭고 무서웠던 같긴하다. 평생 그 집에서 살게 될까봐. 내 인생에 새로운 시작 같은 건 영영 없을까 봐.
다시 태어나면 윤상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다행이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윤상보다 더 멋진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마 그때부터 희망을 조금씩 보았던거 같다.
어쩌면, 어쩌면 내 인생도 빛 날 수 있지 않을까?
20년 동안 매일 꾼 꿈이 이루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그리하여 이사를 간다.
그토록 원해 마지 않던 곳으로 나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