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나의 해방일지

김영심 2023. 4. 29. 21:53

염기정. 삼남매 중 첫째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등장 인물 중 철딱서니 없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심하지 않을 때보다 한심할 때가 더 많다. 거의 시종일관 한심하다. 가령 기정의 동생들은 부모님을 도와 집안 일과 농사 일을 거드는 반면 장녀 기정은 가족들이 고생을 하던 말던 신경 안 쓰고, 지 하고 싶은데로 사는 마이웨이의 당찬 기백을 드러내는 식이다.

마냥 웃으면서 볼 수 없는 사정은 그러고 있는게 내 모습과 너무 비슷해서 꼴 보기 싫을 지경이기 때문. 우리 가족은 그 꼬락서니를 어떻게 견뎠을까.

장녀 기정의 기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에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남자에게 고백 받으면 “니 주제에 어떻게 감히 나를 넘 봐?”라며 팔짝 뛰었던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당찬 미친년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누구나 언제까지고 승자일 수 없는 법.

기정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발견한다. 완벽하게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쉽사리 고백 하지 못하는데, 그도 그럴것이 입장이 바뀌어 과거에 그녀가 그랬던거처럼 고백했다가 화를 당할 처지에 처했으니 돌연 두려울 수 밖에.
숱한 고민 끝에 그리고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솔로로 지냈으므로 화를 당할 위험을 무릅 쓰고서라도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을 받아 용기 내어 고백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고백하기 전 날 그녀는 회개의 의미로 달밤에 혼자 벽을 보고 기도를 올린다. 그 동안 자기에게 고백한 죄로 처참하게 화를 당했던 남자들에게 모질게 군 과거의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눈물의 참회 기도 말이다. 의미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당연히 그런다고 손 쉽게 죄 사함을 받을리없으므로 인과응보 원칙에 따라 상황은 알맞게 돌아 간다. 기정은 고백을 하고 그리고 차인다.

드라마 보는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아 쟤는 진짜 정신 좀 차려야 돼” 순간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인가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진작 철 들어 성격 둥글둥글한 사람들은 어떨까? 후회와 통한의 과거가 없는 인생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존재한다면 어떤 삶일지 궁금하다.

집에 있을 땐 항상 기분이 좋지만 이런 잡스런 생각으로 조금은 차분해진 모습을 본 지수가 말을 건다.

- 아이스크림 먹을래?
- 아니
- 포카칩 먹을래?
- 아니
- 새우깡 먹을래?
-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 밀크티 먹을래?

연보라색 타로 밀트티 속에서 흑진주 같이 선명하게 반짝이는 펄을 청소기와 같은 강력한 흡입력으로 쭈욱 입안으로 빨아 들인다. “쫙쫙, 쩝쩝”소리를 내며 쪽득쫀득한 펄을 씹어 먹는다. 볼썽 사나울 수 있지만 자고로 이건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

먹을 때는 좋았는데 다 먹고나니 갑자기 살찔까봐 몹시 겁이 난다. 참을 껄 그랬어. 괜히 먹은거 같다고 말하는 내게 지수가 “어짜피 먹은 거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야 행복했으면 됐잖아” 라고 슥 지나가며 얘기한다.

어? 듣고 보니 그런거 같기도 하다.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일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걸. 대신 같은 잘 못을 저지르는 실수는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펄을 포기할 수 없으니 다음 번 주문엔 당도를 좀 더 낮춰 보는 것도 방법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