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쓴 글을 읽으면 나도 작가처럼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샘 솟는다. 쓰고 싶은 글은 재미있고 명량하면서 약간은 엉뚱하고 바보 같은 이야기. 읽으면서 키득키득 웃게 되는 글이다.
중요한 건 가독성이다. 다채로운 단어와 문장이 만들어 낸 매끄러운 활자 위로 흘러가는 눈동자가 속도감 있게 박차고 나가서 와라라라 읽히는 와중에 웃긴 얘기면 더할 나위 없겠지. 웃기지 않는 얘기를 할거면 적어도 하나의 글을 관통하는 핵심주제가 명확해, 읽고나면 생각할 거리를 독자의 손에 들려 보내야 민망함은 면하리라.
글을 잘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 그 전에 나는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 그건 순전히 재미있기 때문. 다른 사람이 쓴 글도 재밌지만 가장 재밌는 건 과거의 내가 쓴 글이다. 업무적으로 필요에 의해 이런저런 글을 읽고 쓰는데 사실상 회사에서 하는 일의 팔할은 읽고 쓰기다. 업무적인 글의 형식과 구성은 일기나 수필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서인지 에세이 같은 글은 내가 썻다는 감각 조차 망각하기 일쑤다. 내가 쓴 글임에도 매번 타인의 글같은 기시감이 들어 실상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과 별반 차이 없기도 하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화자이기도 하고 청자이기도 하다. 그덕에 바쁜 현대사회에서 일타쌍피의 미덕을 효율적으로 향유한다. 가성비 좋은 취미다. 가성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거의 돈이 들지 않는다. 지금 이 글도 쇼파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써재끼는 까닭에 기껏해야 핸드폰 충전비에 상당하는 전기료 말고는 들어갈 돈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미도 돈이 있어야 하고 밖에 나가면 다 돈이 들지만 글쓰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얼마든지 풍요롭고 넉넉한 무적의 취미생활을 가능케한다.
글을 쓰는 건 재미있다. 재밌다고 해서 쉬운 건 아니다. 쉽지 않다고해서 이토록 풍요로운 취미를 내동댕이 치는 건 그다지 현명한 처사도 아니다. 성실하고도 끈기가 뛰어난 나의 성정상 여러 작가의 글을 읽은 토대로 나름의 글 잘쓰는 비법의 정수를 발견해냈다. 상도덕상 업계 비밀을 까발리는게 마음이 쓰여 오픈하기가 꺼려진다. 허나 웃기지 않는 얘기를 할거면 뭐라도 독자의 손에 들려 보내야 한다는 작가적 소명을 소홀히 할 수 없기에 몇 날 며칠 번뇌하다가 드디어 오늘에서야 그 날이 됐음을 직감하고 누설할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 비법은 바로 존나 많이 쓰는 거다. 존나 많이 쓰지 않고서는 존나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업계비밀 누설이라더니 고작?’이라며 성급히 김을 빼긴 이르다. 내말 끝까지 들어보시라.
글을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처음 글을 쓸라치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흰 여백의 깜빡이는 커서를 먼저 당면해야한다. 무엇을 쓸까.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전에 감각한다. 대개는 당혹스러움이 밀려올 것이다. 혹자는 공포감을 느낀다고도 하는데 나는 등단한 작가도 아니고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며 나조차 잘 쓸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에 공포나 두려움 또는 그 비슷한 감정은 느끼진 않고 그냥 아무생각이 안 난다. 뭘 쓸지 몰라서 멍하니 있나? 아니다. 저돌적이고 모험심이 뛰어난 나는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 그렇게 아무말이나 지껄이다보면 지금처럼 이런 글이 탄생한다.
김연수 작가의 책에 의하면 처음 쓴 글. 통상 초고라고 하는데 김작가님은 ‘초고’보다는 ‘토고’가 더 적당한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토할 정도로 못 쓴 글’이라서. 나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상당히 적중하다. 아니다. ‘상당히’라는 단어는 부적합하다. ‘백퍼센트’ 적중하다. 유명한 작가님도 인정하시는바와 같이 초고라함은 필시 토가 쏠릴 정도로 못 쓸 수 밖에 없다. 흰 여백에 아무말이나 지껄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러운 사고흐름 체계상 ‘그렇다면 이글은 김영심 작가의 초고겠군’ 이라 짐작할 것이다. 흥 어림없다. 이 정도로도 물론 토할것 같지만 나의 진짜 토고를 못 봐서 하는 소리다.
발레 수업에 참여하려면 그 전에 스트레칭부터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은 얼마 가량의 시간을 할애하는지 몰라도 나는 1시간 가량 스트레칭해야 비로소 몸이 풀리고 발레를 할(정확하게는 발레 흉내를 낼) 준비가 된다. 스트레칭을 안 한 상태에서 발레를 하는 건 부상의 위험도 높고 그 이전에 발레에서 요구하는 정확한 동작을 수행할 수 없다. 아무리 경력이 오래 된 프로 발레리나도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스트레칭 동작을 반복한다. 발레 경력이 오래됐다는 말은 스트레칭 경력도 자동 오래됐다는 뜻이 된다. 발레리나가 일평생 동안 무대에서 발레 기량을 뽐내는 시간 보다 무대 뒤에서의 스트레칭 시간이 더 많으리라. 스트레칭 없이 발레리나가 된 경우는 내 발레경력을 걸고 장담하건데 단연코 존재할 수 없다.
무대에서 보는 발레 동작은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스트레칭 동작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내 모습에 비추어보자면 우스꽝스러움에 가깝다. 근육을 최대한 늘리고 비튼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특정 스트레칭 동작은 조선 시대 주리 트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주리를 안 틀려봐서 모르겠지만 할때마다 자동적으로 욕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신빙성 있다.
‘토고’ 아니 ‘초고’는 스트레칭과 같다. 스트레칭을 하지 않으면 발레 동작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초고를 쓰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스트레칭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만 발레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초고 쏟아 내야만 글을 빚을 수 있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필경 초고를 많이 뽑아 냈다는 뜻이다. 초고를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어야지만이 아무말이나 지꺼렸던 글자 반죽 덩어리가 비로소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글과 비슷한 형태가 된다. 초고를 다듬을수록 점점 더 유려한 글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다듬다보면 초고와 최종본은 아예 다른 글인 경우도 왕왕 생긴다. 스트레칭을 보는 것과 무대 위의 발레리나를 감상하는 느낌이 전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독자에게 탈고하지 않은 초고를 읽혀 구토감을 선사하는 것은 발레리나가 무대에서 발레를 하는게 아니라 스트레칭을 선보이는 형국이다. 무대에서 스트레칭을 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아니다. 그런 법은 없다. 무대에서 스트레칭을 해도 범법자가 되는 건 아니므로 해도 된다. 다만 스트레칭 하는 걸 보려고 돈 내고 올 사람이 없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초고를 독자에게 던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독자에게 토를 쏠리게 한 작가에 걸맞게 욕을 먹을 뿐이다.
만약 내가 업계에 비밀을 폭로한 대가로 벌을 받아야 한다면 현대사회의 미덕에 따라 효율적으로 치르고 싶다. 일타쌍피로 토고를 공개한 오명의 벌도 같이 치르는 것이 나으리라. 사과는 미리했어야 하는데 업무적 글은 매번 두괄식으로 썻더니 이 글만은 미괄식으로 쓰고 싶었다. 토를 쏠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흡사 주리를 트는 것과 비슷한 스트레칭 동작을 수행해며 스스로 내린 형벌을 달게 받는다. 영심아 이런식의 글은 곤란하다. 다음엔 더 잘 써보자고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