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영혼의 대화

김영심 2026. 4. 25. 00:10

문득, 아주 오랫동안 제대로 된 글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줄 적는 일기 말고, 업무상 어쩔 수 없이 보내는 메일 말고, 솜뭉치처럼 흐릿하게 뭉쳐 있는 생각들을 한 가닥씩 풀어 직조해내는 글 말이다. 그런 글은 분량과 상관없이, 쓰고 나면 개운하다. 땀 흘려 운동을 마친 뒤의 상쾌함 같기도 하고, 감기 기운으로 으슬으슬할 때 뜨끈한 곰탕 한 그릇을 비워낸 뒤의 든든함 같기도, 추운 날 비바람을 피해 들어간 따뜻한 사우나 같기도 하다.

구마 사제로 유명하신 김웅렬 신부님이 한 프로그램에 나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영혼에 숨어든 악마를 몰아내려면, 반드시 그 이름을 알아야 한다고. 그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악마 스스로 말하게 할 때까지 지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름을 알아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이름)아 물러나라!” 라고 명령을 해야 내쫓을 수 있는게 아닐까 추측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름이라는 것은 악마에게만이 아니라 천사와 인간에게도 중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 모습이 하나가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나,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 있을 때의 나, 연인을 대할 때의 나, 회사에서 일하는 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스스로가 어딘가 어색했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 나’인지 알 수 없는 기분. 나만 이런 걸까, 아니면 원래 사람은 다 이런 걸까.

그 문제로 꽤 오래 고민했지만, 시간이 흘러 내린 결론은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것. 상황과 역할이 달라졌는데도 단 하나의 모습만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사회화가 덜 된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 다만 전제가 있다. 어떤 모습이든, 그 안에는 진심이 있어야 한다.

왜 꼭 진심이어야 하느냐고? 예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 아니라 ‘이용’이다. 사람을 이용하려는 순간, 그 관계는 사랑과 가장 멀어진다. 이용의 대상이 상대방일 때도 비인간적이지만 내가 나를 이용하는 것도 비인간적이다. 모든 역할에 충실히 하려는 욕심이 지나쳐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러니 영심아 언제나, 누구에게나, 또한 스스로에게도 가능한 한 선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자.

가끔 오래전 TV에서 보던 인물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다시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세월의 흐름에서 오는 변화와는 다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청년이 장년이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넘어,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외모의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쩐지 영혼 자체가 달라진 듯한 느낌.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낯섦.

김웅렬 신부님 얘기를 이어 하자면 인간이 악령에 씌였는지는 눈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최근에 읽은 책, 수도원 기행(공지영 저), 아무튼 명상(이은경 저)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한 대목이 있었는데, 오랜 수도생활을 한 신부님, 수녀님, 스님들의 눈은 맑고 깊다고 한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을 알 수 있는게 신비롭다.

어린아이들의 눈이 유난히 맑은 것도 그 영혼이 순수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각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에 따라 영혼은 맑아지기도, 탁해지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사람들 역시, 오랜 시간 속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품게 되었고, 그것이 눈빛으로 드러나는게 아닐까?

눈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면 내 경험으로 ‘눈’을 보는 것과 ‘눈동자’를 보는 건 완전히 다르다. 사람과 대화할 때 눈을 보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상대의 눈동자를 직시하라는 의미 보다는, 조금 완화해서 눈 주변(눈썹, 미간 등) 전체적으로 시선을 퍼지게 하라는 뜻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눈동자를 보고 얘기하는 건 무지하게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초면인 경우엔 더더욱. 못 믿겠으면 시도해 보시라.

상대방의 눈동자를 보면 영혼이 맞닿는 묘한 기분이 든다. 친한 사람의 눈동자를 보면 사랑과 애정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하는 내내 눈동자만 보고 말하는 건 정신병자 같고, 자연스럽지도 않다. 시선이 여러군데로 흐르도록 시원한 공간을 둔다. 반면 초면인 사람의 눈동자를 잠깐이라도 정확히 직시 해 보면 상대방이 잘 못한게 전혀 없어도 화들짝 놀라거나, 불편을 넘어 불안해 하는 걸 느낄 수 있다. 낯선 영혼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기분은 썩 좋은느낌이 아닌 것이다.

요즘 가족 외에는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고, 사실 외로움도 덜 타는 편이다. 가끔 외로움이 스칠 때면 손에 꼽히는 몇몇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외의 애매한 모임들은 점점 피하게 된다. 덕분에 나와 함께 고요한 시간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학창 시절 방학이면, 신발을 마지막으로 신어본 날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집 안에만 머물렀다. 그런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 그때 알았다. 나에게 ‘집’이라는 공간과 혼자있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지금도 여전히 조용히 집에 있는 게 좋다.

물론 단점도 있다. 집에만 머물면 금방 게을러지고, 생활의 리듬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바깥 공기를 쐬려 한다. 얼마 전 사주를 봐주신 분이 “밖으로 돌아다녀야 운이 트인다”고 했는데,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밖에서 활짝 펼쳐 훨훨 날아 오르느라 지친 영혼의 날개는 고요한 쉼이 필요한 법.

사람과의 피상적인 말 말고, 내면의 대화를 나눈 지 오래인데다 글까지 쓰지 않았더니, 오늘은 말이 길어졌다.